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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에서 벗어나기

1부 : 최저시급의 굴레

2부 : 호주의 노동자

3부 : 꿈의 직장, 공항면세점

4부 : 첫 사업 실패

5부 : 다시 직장으로

6부 : 월급에서 벗어나다

 

 

머리가 길었던 26살 (아마도?)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좋아했고 무슨 일이든 곧 잘했다. 배우는 것도 빨랐고 인정 욕구도 높았기 때문에 지난 8년간의 월급쟁이 인생은 나쁘지 않았다. 주5일을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시간이 끝나면 오롯의 나의 삶으로 돌아가는 워라벨도 잘 지켰다. 다혈질로 원하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빡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쉽게 오르고 또 쉽게 꺼지는 양은냄비결의 인간이었던 만큼 그 순간도 그 순간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위해 삶의 대부분을 내가 완전히 행복하지 않는 일을 하며 보내는 모순이 싫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매 순간 순간이 지출이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먹으려면 음식을 사야한다. 살기 위해서 자야한다. 잘 곳도 돈이 많이 든다. 물도, 전기도, 가스도 모두 돈이다. 그러니까 살아있기 위해 돈을 벌어야하며 고로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한다.




처음 돈을 벌었던 18살. 프렌차이즈 레스토랑에서 받았던 시급은 4,110원. 토요일과 일요일 8시간을 일하고 한 시간 무급의 저녁시간을 받았다. 하루 32,880원. 한달 8일을 일하면 263,040원이 손에 쥐어졌다. 당시 3000원을 내고 레스토랑에서 제공해주는 저녁을 먹었는데, 카레 한 그릇을 바라보며 ‘이게 나의 43분 어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이때는 부모님집에 살았기 때문에 내 통장으로 들어온 26만원은 오롯이 나의 용돈이 되었다. 돈 뿐만 아니라 첫 아르바이트를 통해 배운 점도 많았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사회생활의 아주 기본적인 것들. 예를 들면 진상을 대처하는 방법, 눈치껏 스스로 일을 찾아하기, 사장 앞에서 말 조심하기 등등. 거기에 당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 고추가 심심한 새끼들이 있었다. 그때 어렴풋 알고 있던 사실이 완벽히 뇌에 꽂혔다. ‘아 남자를 조심해야한다.’



이후 20살 대학교에 들어가 자취를 하면서 나의 궁핍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때는 마트에 입점한 로드샵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총 근무시간 10시간. 무급휴게 시간 한 시간. 최저임금 4580원으로 일급은 36,640원. 대중교통이 끊기는 마감시간까지 일을 하면 야간수당으로 하루 7000원이 더 지급되어 하루 43,640원. 한 달 중 8번을 일하면 349,120원이 되었다. 자취방은 룸메이트와 반을 나눠 20만원을 냈다. 월세 비용, 식비, 통신비용, 교통비를 하기에도 빠듯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저녁시간이 되면 삼각김밥이 남았을지부터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는 그것마저 사먹을 돈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다. 눈물겹게 빈곤했다. 하루는 돈까스가 너무 먹고싶어서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그 궁핍이 넌더리가 났다. 대학교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이 짓을 4년동안 할 자신이 없었다. 최저시급을 받는 나는 최저의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대학생인 나는 술과 담배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외 달라진게 없었다. 그럼에도 성인이기에 집을 떠나야했기에 살아 숨쉬는 매 순간을 책임져야했다. 벅찼다. 당장 오늘이 급한 내가 어떻게 미래를 위해 대학교를 다닐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 학기만에 대학교를 그만뒀다.




대학교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취업을 시작했다. 한 학기만에 중퇴한 대학생은 당연히 최저시급행이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주휴수당이 있었다. 주5일, 하루 9시간을 일해 세금을 다 내고 남은 130만원은 너무 값졌다. 처음 백 단위의 돈이 내 통장에 들어왔을 때 믿기지 않았다. 월세를 내고, 식비를 내고, 통신비를 다 내도 돈이 남았다. 그렇게 먹고싶었던 맘스터치를 먹었고, 눈에 아른거렸던 치킨도 시켜봤다. 그래 나의 삶은 이런 월급이라고 감격했다.

아쉽게도 그 감동은 반년이 채 가지 않았다. 해가 바뀌며 최저시급이 올라 월급이 올랐다. 기뻤으나 가만 생각해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나의 모든 삶은 최저시급에 매여있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최저시급이 오르지 않으면 난 계속 150을 받는다. 객관적으로 나를 봤을 때 나는 고졸에 기술도 없다. 지금 이 삶도 나쁘지는 않은데,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다 한 남자애를 만났다.



그 애는 나와 동갑이었으나 시간을 쓰는 방법은 달랐다. 그 애는 내 월급을 생활비로 집에서 받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강남의 오피스텔 비용도 내준다고 했다. 유학을 가기위해 영어 자격증인 아이엘츠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유학을 하고 나면 아버지 회사의 해외지사를 받을 계획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해본적이 없었다. 그때 든 마음이 질투였는지 부러움이었는지 동경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 3가지가 모두 혼재된 상태로 묵묵히 치킨만 먹었던 것 같다.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 위험하다며 그 애가 예약한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은 편했다. 한강을 건너 술집과 노래방이 즐비한 자취방 동네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 참 밖에서 담배를 폈다.

그 애가 간다는 호주의 최저시급을 검색했다. 15.96호주 달러. 당시 한화로 19,000원 이었다. (뭐야 지금이랑 비교하면 aud 엄청 높네) 그때 호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한 달을 학원에서 거의 살며 공부했는데 아마 이때 이렇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건 일을 안하고 공부만 해도 된다는 기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따박따박 나오는 밥을 먹으며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머리는 아파도 행복했다. 시험일이 다가와 초조했음에도 당장 다음달에 내야하는 돈에 대한 부담에서 해방되니 숨이 트였다. 한 달 동안 내가 걱정해야하는게 궁핍에서 헤엄치는 나의 삶이 아니라 아이엘츠 시험 점수 라는 사실이 즐거웠다. 공부가 다시 보니 선녀였다.

그렇게 한달을 공부하고 진짜 점수를 땄다.

비행기 표를 위해, 호주에서 자리를 잡기 전 생활비를 위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24시간 중 9시간은 자고, 11시간은 일하고, 4시간은 마치 없던 시간 처럼 쪼개지는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목표가 있었고, 이 일을 평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21살 호주로 떠났다.

- 이후 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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